[스페셜] <똥파리>부터 <벌새>까지… 독립영화 날아오르다 ①~⑤
지난 10년 기록해야 할 한국 독립영화와 의미 있는 사건들 그리고 <벌새> 김보라 감독 인터뷰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해외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수집하다시피했던 10년 전의 그때처럼, 8월 29일 개봉예정인 김보라 감독의 <벌새>가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벌새>는 단편 <리코더시험>(2011)으로 주목받은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 서울을 배경으로 14살 소녀 은희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벌새>는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거대한 역사와 특별한 기억을 소환한다. 이러한 <벌새>의 영화적 성취를 생각하며, <씨네21>은 <똥파리>부터 <벌새>까지 지난 10년의 한국 독립영화를 돌아보았다. <벌새>의 리뷰와 김보라 감독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타임라인으로 살펴보는 한국 독립영화 10년의 역사, 독립예술영화 시장에 대한 진단, 2010년대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가 기억해온 것들을 정리했다. 한국 독립영화가 높이, 멀리, 오래 비상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출처: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3746&fbclid=IwAR2whbeRQ1hiW-td8gAtl_Ate3UL4ErX-PX0FCJi8XumWJVzYsQzFh9q7uI
[한국 독립영화①] 신비롭고 아름다운 영화 <벌새>에 대하여
온화한 슬픔이 차오른다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영지 선생님(김새벽)이 은희(박지후)에게 전한 말처럼 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죄스러운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마른 눈물자국을 눈물로 지우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이다 보면 세상은 다시 신비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단 말인가.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1994년 10월의 성수대교 붕괴 참사를 서사의 축으로 삼는 영화다. 성수대교 붕괴와 세월호 침몰, 무수한 참사 이후의 세계를 살면서 세상이 아름답다 말하는 건 어불성설 같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유한한 삶을 무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더 깊은 사랑과 더 따뜻한 응시로. <벌새>의 주인공인 14살 은희가 깨지고 배신당하고 상처입지만 다시 상처를 꿰매고 보듬어 전과는 달라진 세상을 달라진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과 관객상을 시작으로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18회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 제45회 시애틀국제영화제 등에서 상을 받은 것도 <벌새>가 전형적인 성장영화 그 이상의 의미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은희는 1초에 90번까지 날갯짓을 한다는 작지만 단단한 벌새 같은 아이다. 흥미롭게 팽창하는 은희의 소우주는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성과 자본주의사회의 욕망까지 서늘하게 품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명제와도 부합하는 은희의 성장 서사는 결코 팬시한 서정에 머물지 않는다.
<벌새>의 첫 장면은 마치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장르영화의 오프닝 같다. 엄마(이승연)의 심부름을 다녀온 은희가 아파트 초인종을 몇번이고 눌러도 철문 너머에선 응답이 없다. “엄마, 문 열어줘.” 은희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은희의 외침이 다급한 구조 요청 같다 느껴질 때 카메라는 서서히 아파트 문의 호수를 비춘다. 902호. 은희는 한층의 계단을 올라가 1002호 초인종을 다시 누른다. 그제야 엄마가 문을 열어준다. ‘사랑받고 싶은 14살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를 생각했을 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오프닝은 아니다. 층수를 헷갈린 은희의 실수는 머쓱함이 아니라 불안함과 연결된다. 끈끈하지 못해 애착하게 되는 불안일까. 가장 사랑하는 존재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공포일까. 닫힌 문 너머 ‘응답 없음’ 이라는 신호 앞에서 은희는 불안하다. 불안, 균열, 붕괴, 죽음의 징후는 은희의 세계를 맴돈다.
삶과 죽음이 경쟁하는 세계에서 기쁜 일과 슬픈 일은 대체로 동시다발적이다. 사랑과 우정에서 비롯되는 기쁨과 아픔도 마찬가지. 학교에서 은희는 우열반 중 열반 학생이다. 떠듬떠듬 영어책을 읽는 수업시간보다 남자친구 지완(정윤서)에게 온 삐삐메시지(1004, 486, 486)를 확인하는 쉬는 시간이 행복한 중학교 2학년. 단짝 친구 지숙(박서윤)과는 한문 학원을 함께 다닌다. 오빠에게 맞고 사는 동생들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더 끈끈한 관계다. 1학년 후배 유리(설혜인)에겐 고백까지 받는데, 유리 앞에서 <사랑은 유리 같은 것>을 부르는 은희는 퍽 어른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인력과 척력의 원칙을 따른다. 좋은 일을 밀어내는 나쁜 일 또한 연쇄적이다. 입술까지 맞춘 지완은 바람을 피우고, 문방구에서 도둑질을 하다 지숙과 사이가 틀어지고, 좋아한다던 유리는 떠난 마음을 알린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배신은 아프다. 어떻게 멀어진 사이를 이어 붙일지, 어떻게 깨진 믿음을 봉합할지 은희는 알 수 없다. “어떻게 그 다리가 무너지니”와 같은 탄식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세계에 덩그러니 서 있을 뿐.
믿음의 붕괴, 관계의 균열은 집 안에서도 수시로 목격된다. 은희의 부모님은 떡집을 운영하느라 바쁘다. 강남 8학군에 진학을 못한 언니 수희(박수연)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다. 부모님 몰래 학원을 빼먹고 밤늦게 귀가하기 일쑤라 제 집인데도 장롱에 숨어 있거나 동생 찬스를 통해 몰래 집 안을 드나든다. 장차 서울대에 입학할 아들로서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오빠 대훈(손상연)은 은희에게 종종 폭력을 행사한다. 오빠를 편애하는 가부장적 아빠(정인기)와 고된 노동과 살림에 지친 엄마는 밖으로 도는 언니 수희의 교육 문제를 두고 유리갓 스탠드가 깨져라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후배 유리에게 꽃 선물을 받고 한껏 들떠 집에 도착해 싸움을 목격한 은희는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거실에서 TV를 보며 피식거리는 부모님의 모습이 의아하다. 산산조각난 유리 조각의 날카로움이 은희의 몸속엔 아직도 박혀 있는 듯한데,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았던 지난밤의 위태로움은 금세 평범한 어느 오전의 집안 풍경으로 대체되어 있다.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목격한 은희가 다음으로 하는 일은 환한 햇살 아래 단짝 지숙과 트램펄린장에서 높이높이 방방 뛰는 것이다. 좋은 일을 밀어내는 나쁜 일, 부정적 기운을 밀어내는 밝은 생의 기운. 대립하는 기운의 작용과 반작용, 상반된 운동 에너지의 교차로 은희의 세계는 채워진다. 그것은 곧 세계가 구성되는 방식이고, 영화 <벌새>가 치밀하게 직조된 구조의 영화임을 말해주는 요소이다.
그리고 아직 얘기되지 않은 영지 선생님. 아이러니하고 미스터리하기만 한 세상에서 손잡고 함께 걸어가고 싶은 존재가 은희에겐 영지 선생님이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는 싸구려 구호를 외치게 하는 학교 선생님과 달리, “공부 열심히 해서 여대생이 돼야 해”라고 말하는 엄마와 달리, 영지 선생님은 이제껏 은희가 어른들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말들을 한다. 얼굴을 아는 친구가 아닌 마음을 아는 친구가 몇이나 되냐고, 함부로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누구라도 널 때리면 끝까지 맞서 싸우라고. 사고를 뒤흔드는 이런 말들에 은희는 어쩌면 이 세상이 신기하고 아름답지 않을까 하고 느낀다.
귀밑 혹을 제거해야 하는 은희에게 의사 선생님은 말한다. 수술이 성공해도 상처는 남는다고. 그리고 수술에서 깨자마자 은희는 말한다. “제 혹 어디 갔어요?” 은희에게서 떨어져나간 혹은 정말 어디로 갔을까. 나에게서 떨어져나갔다고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텐데. 죽음의 징후 역시 여전히 은희의 소우주를 떠돈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외삼촌의 방문과 죽음,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 사라져버린 혹, 학원을 그만둔 영지 선생님, 찢겨진 철거민들의 현수막, 성수대교의 붕괴로 이어지는 소멸의 연쇄작용. 뚝 끊어진 철근 덩어리들과 함께 깊이 무너진 마음들. <벌새>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은희의 눈을 통해, 은희를 향하는 눈을 통해 찬찬히 바라본다.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처음으로 가만히 바라보는 엄마, 붕괴된 성수대교를 보기 위해 새벽길을 달린 은희와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운동장에 선 은희가 여기저기 시선을 두는 마지막 응시의 숏까지. <벌새>의 후반부는 유독 따뜻한 응시의 숏들로 채워진다. 우리가 보았다고, 여전히 보고 있다고 말하려는 듯이. 그 마지막 응시의 숏들을 보며 생각한다. 슬픔은 또다시 우리를 살아 있게 할 것이다.
출처: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3747
[한국 독립영화②] <벌새> 김보라 감독 - 그 시절의 나에게, 지금 10들에게 보내는 위로
-세계 영화제를 돌며 25개의 상을 받았다. 린 램지, 제인 캠피온 감독 등도 <벌새>에 찬사를 보냈는데, 기억에 남는 평이나 인물이 있다면.
=곧 <벌새>의 무삭제 시나리오, 비평, 대담이 담긴 책이 나온다. 책에도 실릴 예정인데, 앨리슨 벡델의 미국 버몬트 집에서 이틀 동안 대담을 했다. 그때 벡델이, 여자 중학생 이야기를 마치 영웅의 대서사시처럼 만든 영화를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벌새>가 그런 영화였다며 좋아해줬다. 자전적인 이야기로 창작의 세계를 펼친 벡델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다니! (웃음) <펀 홈>의 성공이 가져다준 여파라든지, 자전적인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너무 많이 한 것에 대한 후회라든지, 이후에 펴낸 <당신 엄마 맞아?>가 비평적으로 덜 성공했다고 느꼈을 때의 좌절감 같은 것도 들려주었는데, 이야기 나눴던 그 시간이 따뜻했다.
-30대를 다 바쳐 10대 시절의 이야기를 <벌새>로 완성했다. 10대 시절을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했던 이유가 있었나.
=심리학 용어 중에 미해결 과제(unfinished business)라는 말이 있다. 내겐 중학생 때의 일들이 미해결 과제처럼 남아 있다고 느꼈다. 그 챕터와 건강하게 안녕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30대를 바쳤다고 하니 장엄해 보이지만(웃음) 이제 하나의 챕터를 끝낸 느낌이 든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이란 시간적 배경이 중요하다. 이 사건이 당신의 삶에 어떤 파문을 남겼나.
=당시 중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붕괴된 다리의 이미지가 충격적이었다. 단절과 붕괴는 은희의 삶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은희의 우주에 계속해서 작은 균열이 생긴다. 그 이미지가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시대의 붕괴, 사회의 붕괴, 일상의 붕괴와도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영화를 통해서는 은희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균열이 성수대교 붕괴라는 물리적 붕괴와 얼마나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야기 구조 안에서 잘 보여주고 싶었다. 시나리오 수정 단계에서 치밀하게 이야기 구조를 고민했다. 예를 들면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과정에서 유리로 된 전등갓이 깨지는데, 깨진 유리 조각을 은희가 소파 밑에서 발견하는 장면을 언제 배치할까 같은 것. 유리가 깨진 건 한참 전이지만 균열의 조각들이, 고함과 부정적 에너지가 유령처럼 집안 곳곳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신의 강약과 리듬을 생각하며 영화의 구조를 직조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의도를 관객이 발견해줄 때 반갑다. 94명의 벌새단 시사회 때 한분이 그런 평을 남겼다. ‘이렇게 따뜻하면서도 불안한 영화는 처음이다.’ 실제 내 의도가 그랬다. 불안하고 서늘한 것과 따뜻하고 희망적인 것이 동시에 있길 바랐다.
-은희가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이 영화에 두번 나온다. 첫 장면에서 집을 잘못 찾은 은희가 문을 두드리면서 엄마를 부르는 장면과 길거리에서 엄마를 부르는 장면. 두번 다 은희의 외침이 엄마에게 가닿지 못한다.
=그 장면에선 엄마로 상징되는 본질적인 것, 가장 가닿고 싶은 존재로부터 멀어지는 것의 공포와 심연을 그리고 싶었다. 사랑하는 존재로부터 버려질 수 있다는 원형적 공포는 나만 느끼는 게 아니더라. 영화에서 은희가 가장 갈망하는 것 중 하나는 엄마와의 연결감이다. 그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은희가 겉돈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엄마는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유심히 바라본다. 엄마는 딸한테 큰일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안다. 은희를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촬영 현장에서 재밌는 일도 있었다. 은희가 길에서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을 찍을 때였는데, 촬영 장소가 아파트 단지였다. 어디서 계속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나니까 동네의 아주머니들이 굉장히 불안해했다고 한다. 혹시 자기 딸은 아닌가, 누구 집 딸이 이렇게 엄마를 부르나 싶어서. 엄마라는 소리에 반응하는 엄마들이 그렇게 있었던 거다.
-5남매의 가족, 떡집을 했던 부모님, 대치동에 살았던 일, 목 뒤에 혹이 나 수술한 일, 한문 학원에서 만난 선생님 이야기 등은 본인의 경험에서 가져온 요소들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어렵지 않았나.
=모건 스콧 펙이라는 심리학자의 책에 ‘날마다 나르시시즘의 싹을 잘라내야 한다’는 문장이 있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걸 적용하려 했던 것 같다. 내가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은희의 고통이 내 것이고 내 고통이 가장 아프다 생각했다면 영화는 지금과 달랐을 거다. 은희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의 고통이고, 나의 고통은 특별할 것도 없고 특별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다. 건강한 거리두기가 가능해지자 픽션으로서의 내러티브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가족과 친밀한 대화도 많이 가졌고,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간들을 정리하고 화해했다. 이 일이 내겐 커다란 삶의 선물이었다. 미해결된 감정, 뒤틀린 감정이 남아 있었다면 은희를 피해자로 그리거나 연민의 시선으로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관계를 돌아보는 작업이 수반됐기 때문에 담담하게 거리를 두고 작가로서의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한문 학원의 영지 선생님(김새벽)의 경우 개인적 이야기가 생락되어 있다. <잘린 손가락>이라는 운동권 노래를 부르는 장면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대학생일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영지 방의 책이라든가, 영지가 부르는 노래라든가, 드문드문 단서로만 영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잘린 손가락>은 강성 운동권의 노래인데, 노래만으로도 캐릭터가 보일 수 있게 선곡했다. 그 장면에선 아이들도 느끼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내게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면 동화되고 마음을 열게 된다. 영지는 나름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위로한다. 누군가가 나눠주는 진심에 아이들도 위로받고, 영지란 사람을 목격할 수 있길 바라며 노래하는 장면을 넣었다.
-영지 선생님의 대사에 본인의 마음을 담은 것 같다. 어른이 된 내가 과거의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혹은 10대의 여자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같았다.
=실제로 시나리오를 쓸 때 영지에 빙의하고 썼다. 성인이 돼서 느낀 많은 것들이 영지의 대사로 나온 것 같다. <명심보감>의 문장이라든지, 삶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말이라든지. 어렸을 땐 ‘삶이 아름답다’같은 말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사랑? 웃기고 앉아 있네. 그런 20대였으니까. (웃음) 나이가 들면서 사랑의 존귀함을 깨닫고, 삶이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단순히 내 삶이 행복하다는 게 아니라,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무늬가 결국엔 아름다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영지의 말을 통해 하고 싶었던 건 크게 두 가지였다. 10대인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 10대 시절을 지나온 무수한 은희에게 보내는 위로. 또 하나는 어른이 된 내가 은희였던 나를 위로하는 것.
-<벌새>에서 세월호 참사를 읽는 이들도 많다.
=2013년에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고, 수정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마음이 아팠고 몸이 아팠다. 어떤 기시감도 들었다. 성수대교 붕괴의 충격이 몸의 기억으로 남아서 내가 <벌새>를 만들었듯이, 세월호 참사를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들이 창작자가 돼서 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 거대한 공동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치유될까 싶으면서도, 시간이 흐르고 이야기를 통해 기억함으로써 희망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세대의 여성감독이고 10대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우리들> <우리집>을 만든 윤가은 감독과 나란히 얘기되는 경우가 많다.
=스타일이 다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성감독이 수적으로 적기 때문에, 소수자일수록 대표성을 띠기 때문에 비교되거나 묶여서 얘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많이 나왔는데도 여성감독들의 영화로 한데 묶여서 얘기된 것처럼. 그리고 <우리들>은 내게 블록버스터영화였다. 영화의 자장이, 감정의 스케일이 거대했다. 마침 여성감독들이 만든 영화들, 윤가은 감독의 다음 영화 <우리집>과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 이옥섭 감독의 <메기>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을 한다. 그런 흐름 속에 내 영화가 있다는 것이 기쁘고, 거대한 각성의 물결이 일어나는 해에 국내외 영화제에서 영화를 상영한 것도 고무적이었다. 그 물결을 같이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지지를 보낸다.
출처: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3748
[한국 독립영화③] 타임라인으로 보는 한국 독립영화 10년의 역사
2009년, 독립영화 관객수 10만명 시대를 열어젖힌 <워낭소리>와 <똥파리>의 등장은 이제 드디어 독립영화도 꽃길을 걸을 수 있게됐다는 기대와 더불어 길고 길었던 정권 탄압의 암흑기가 동시에 찾아온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2009년 이후는 독립영화의 새로운 흥행 기록을 세워나감과 동시에 정책 면에서는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제도가 폐지됐다가 부활하는 등의 잡음이 시작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똥파리>를 시작으로 최근 <벌새>에 이르기까지 한국 독립영화는 꾸준히 어딘가를 향해 날아오르는 중이다. 10년 전에 10만 관객 시대를 열어젖힌 뒤 이제는 1만 관객도 제대로 올려다보기 힘든 시대가 됐다고는 하지만 매년 새로운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작품이 등장하고 있고 새로운 형태의 제작방식을 고민하는 제작사도 등장하는 등 여전히 독립영화는 발전 중이다. 2009년부터 2018년에 이르기까지 독립영화계 이슈들을 간단하게 돌아보자.
2009
-1월 20일 용산참사.
-2월 15일 이숙경 감독 <어떤 개인 날> 제5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넷팩상 수상.
-3월 1일 <워낭소리> 한국 독립영화 사상 최초로 200만 관객 돌파.
-4월 16일 <똥파리> 양익준 감독의 등장. <똥파리>는 한국 독립영화 극영화부문으로서는 최초로 1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다. 용역 깡패 상훈(양익준)과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 여고생 연희(김꽃비)가 보여준 삶의 고통과 지긋지긋한 가족 이야기가 관객의 큰 공감을 얻었다. <똥파리>는 그해 로테르담국제영화제 VPRO 타이거상 수상 이후 각종 해외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수집하듯 수상했다. 양익준 감독이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38관왕에 달했다고. 개봉 당시 30~60개 상영관 정도에서 6주 이상 장기 상영하며 흥행한 기록은 현재 한국 극장가 분위기에서는 도무지 깰 수 없는 ‘넘사벽’ 기록이 되었다.
-9월 3일 <고갈>, 2008년 제한상영가 판정 이후 영상물등급위원회 재심의를 거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
-12월 31일 인디스페이스 휴관.
2010
-2월 21일 우니 르콩트 감독 <여행자> 제6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특별언급.
-3월 18일 <경계도시2>가 보여준 한국 사회의 금기. 홍형숙 감독의 10년의 프로젝트였던 <경계도시> 연작 시리즈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었던 레드콤플렉스를 정면으로 다룬다. 2002년작 <경계도시>가 당시 간첩 혐의를 받고 있던 송두율 교수가 33년 만에 귀향을 준비하는 과정을 다뤘다면 <경계도시2>는 한 개인의 여정을 넘어서 한국 사회 구성원 전체에 바이러스처럼 퍼져 있는 ‘빨갱이’라는 공포의 실태를 담아냈다. 개봉 전부터 많은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정작 개봉 이후 상영관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등 당시 혼란스러웠던 독립영화 배급 구조의 문제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1만여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으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3월 25일 독립영화 다운로드 서비스 사이트 인디플러그 오픈.
-9월 9일 <울지마 톤즈> 개봉(국내 관객수 44만명).
-11월 15일 당시 우근민 제주도지사, 강정 해군기지 건설 공식 발표.
2011
-2월 독립영화 배급지원센터 사업 종료.
-3월 3일 윤성현 감독 <파수꾼>과 이제훈, 박정민의 등장. 2011년은 민용근 감독의 <혜화, 동>,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를 비롯해 윤기형 감독의 <고양이춤>, 김재환 감독의 <트루맛쇼> 같은 다큐멘터리가 1만 관객을 꾸준히 돌파하는 것은 물론, 연상호 감독의 장편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까지 등장해 다양한 장르의 독립영화들이 사랑받았다. 그중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은 필라멘트픽쳐스 배급작으로 2만 관객을 돌파했다. <파수꾼>은 한국영화에서 으레 묘사되곤 했던 10대 소년들의 질풍노도, 이를테면 군대와 깡패라는 조직을 거치며 만들어져가는 마초적인 남성성을 전시하곤 했던 영화들과 결을 달리하는 새로운 세대의 접근법이라 할 만하다. 이들의 우정이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지, 교실이라는 공간의 폭력성을 예민하게 파헤친 영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제작연구과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를 통해 이제훈, 서준영, 박정민, 이초희 등 젊은배우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3월 18일 민용근 감독 <혜화, 동> 1만 관객 돌파.
-5월 29일 박정범 감독 <무산일기> 1만 관객 돌파.
2012
-2월 8일 김경묵 감독 <줄탁동시>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
-5월 민간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재개관.
-6월 21일 연분홍치마와 <두 개의 문> 개봉. 2009년 1월 국가가 자행했던 폭력을 고발하는 영화 <두 개의 문>을 통해 용산참사 진상 규명 움직임을 강력하게 만들어낸 이들은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속의 김일란, 홍지유 공동감독이다. 이들은 용산참사 이후 현장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고 유가족 곁을 지키면서 영화에 담긴 수많은 자료들, 즉 1년 넘게 파헤친 재판 기록,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방송국 영상, 채증 영상 등을 바탕으로 누군가가 묻어두려 했던 진실을 파헤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영화는 당시 개봉과 동시에 일주일 만에 1만 관객을 돌파했고 한달 넘게 장기 상영하며 7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김일란 감독을 비롯해 연분홍치마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4년여의 실형을 살고 나온 5명의 ‘공동정범’ 철거민들을 따라다니면서 참사 이후 뿔뿔이 흩어져버린 진상규명의 움직임을 다룬 영화 <공동정범>을 만들기도 했다. 연분홍치마는 2012년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독립영화인상을 수상했다.
-8월 6일 이대희 감독 <파닥파닥> 1만 관객 돌파.
-김기덕 감독 <피에타>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11월 28일 <범죄소년> 1만 관객 돌파.
2013
-3월 21일 오멸 감독의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가 보여준 지역의 영화. 한국영화 최초로 선댄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오멸 감독의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는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일종의 제사 형식을 빌려 만든 영화다. 개봉 당시 14만3천여명의 흥행 기록을 세워 당시 <똥파리>의 기록을 깨기도 했다. 제주에서 먼저 개봉해 1만 관객을 돌파한 사실도 화제가 됐다. 제주에서 활동하는 오멸 감독은 꾸준히 제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재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 지역영화 감독으로, 그가 세운 제작사 자파리필름의 구성원들은 모두 제작과 연기를 겸한다. 오멸 감독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한국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폭력의 역사를 소재로 해 고통과 웃음을 수반한 페이소스 짙은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는 물론 앞으로도 꼭 주목해야 할 독립영화 감독 중 한 사람이다.
-4월 경기영상위원회, 다양성영화관 개관.
-5월 23일 이창재 감독 <길 위에서> 5만 관객 돌파.
-9월 4일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천안함 프로젝트>에 대한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 기각.
-11월 21일 연상호 감독 <사이비> 2만 관객 돌파.
2014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0월. 19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상영 금지와 관련한 외압 사태.
-11월 1일. 무비꼴라쥬가 개관 10주년을 맞아 CGV아트하우스로 명칭 변경.
-11월. 독립영화의 흥행을 알린 <한공주>(2013), <족구왕>(2013),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43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수상한 <한공주>는 밀양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인 주인공의 삶을 통해 힘겹고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2만여 관객동원이라는 이례적인 흥행을 낳았다. 여름 시장에 <군도: 민란의 시대> <명량> <해적: 바다로 간 산적> <해무>와 어깨를 나란히 한 우문기 감독의 <족구왕>은 4만 6천여 관객을 모으며 작지만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복학생의 유쾌한 족구 도전기를 통해 절망에 익숙한 청춘세대의 초상을 웃음기 넘치게 그리면서 독립영화의 재기를 증명한 작품이다. 같은 해 겨울, 강원도에 사는 어느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개봉 29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2009년 1월 개봉한 <워낭소리>를 뛰어넘은, 한국 다큐멘터리 흥행사의 경신이 이루어졌다.
2015
-5월.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은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이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미술전에서 한국 최초로 은사자상 수상.
-5월. 신수원 감독의 <마돈나>.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상영.
-5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영화제 인디포럼 20주년.
-6월. <소셜포비아>(2014)와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가 만든 길. 온라인 마녀사냥을 소재로 한 홍석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소셜포비아>가 한국 독립영화 사상 최단기간 10만 관객 돌파에 이어 전년도 <한공주>의 기록을 뛰어넘은 약 25만 관객 달성에 성공했다. 일본 고조시를 배경으로 꿈같은 로맨스를 펼쳐낸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약 3만 6천명의 스코어를 기록하며 제작비 대비 준수한 성적을 냈다. <소셜포비아>의 흥행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투자, 배급, 상영을 아우르는 CGV아트하우스가 한국 독립영화의 공룡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한편, 인디스토리가 배급한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사례는 한국 독립영화가 가진 기존의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에서 탈피해 여행과 로맨스를 강조한 마케팅이 시장에서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7월 16일. 고향 밀양의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할머니들을 다룬 박배일 감독의 다큐멘터리 <밀양 아리랑> 개봉.
2016
-4월. 독립영화 속 유니버스들의 탄생. 박석영 감독이 <들꽃>(2014) 이후 <스틸 플라워>(2015)를 발표하면서 사회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 인물을 좇는 ‘꽃 시리즈’가 이어졌다. 2016년 3편인 <재꽃>이 나오기까지 시리즈를 오롯이 책임진 배우 정하담은 봉준호 감독에게 “접해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배우”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개성 있는 배우의 등장을 알렸다. 그해 여름 5만 관객을 돌파하며 여성감독이 만든 어린아이들의 서사가 흥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 윤가은 감독의 데뷔작 <우리들> 역시 독립영화 흥행사 안에서 매우 드물고 반가운 현상으로 기록된다. 윤가은 감독은 올해 두 번째 장편영화 <우리집>을 발표하면서 윤가은 유니버스를 공고히 다지고 있다.
-10월 13일. 최승호 PD(현 MBC 사장)가 연출한 서울시공무원간첩조작사건을 시작으로 국정원 비리를 파헤치는 디큐멘터리 <자백> 개봉. 14만 관객 동원.
-12월 8일. 온라인 게시판 ‘일베’와 종로에서 활동하는 애국단체 회원으로 각각 활동하는 손자와 할아버지의 ‘헬조선’ 생존기를 그린 <우리 손자 베스트> 개봉.
2017
-1월. 든든한 젊은 제작사들의 활약. 아토 ATO, 광화문시네마, 봄내필름 등 자생적인 움직임을 시작한 젊은 제작사들의 존재감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시기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로 필모그래피를 연아토ATO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제정주, 김순모, 김지혜, 이진희 프로듀서 4인이 모인 제작사다. 2017년 신준 감독의 <용순>, 김종우 감독의 <홈>을 제작한 아토ATO의 활동은 2018년 신동석 감독의 <살아남은 아이>, 2019년 <우리집>으로 이어진다. 김태곤·전고운 감독이 공동대표로 자리한 광화문시네마는 <1999, 면회>와 <족구왕>을 거쳐 이요섭 감독의 <범죄의 여왕>(2016),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2017)를 제작하면서 광화문시네마만의 경쾌한 색채를 더해가고 있다. 김대환·장우진 감독이 힘을 합친 봄내필름은 <춘천, 춘천>(2016), <초행>(2017), <겨울밤에>(2018) 등 두 감독의 고향인 강원도의 지역성을 강조하며 특색을 살렸다.
-6월.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진흥위원회 공청회에서 블랙리스트 사태 사과 및 사업계획발표. 2017, 2018년 독립영화전용관 운영지원과 관련해 적폐 청산과 개편 요구 목소리 커져.
2018
-1월 25일. 용산참사 이후 남은 철거민들의 고통에 주목한 김일란·이혁상 감독의 다큐멘터리 <공동정범> 개봉.
-9월. 1998년 “독립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출발한 한국독립영화협회가 20주년을 맞았다. 인디스토리, 정동진영화제도 20주년을 맞아 한국독립영화의 위기와 산업 진단, 정권 교체 이후의 변화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마련됐다. 2017~18년은 눈에 띄게 여성감독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해다.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 정가영 감독의 <밤치기>, 김인선 감독의 <어른도감>, 유지영 감독의 <수성못> 등에 이어 2019년에는 윤가은·김보라·유은정·이옥섭 감독의 작품이 개봉을 확정했다.
-11월. <살아남은 아이> 성유빈, <당신의 부탁> 윤찬영, <영주> 탕준상, <뷰티풀데이즈> 장동윤 등 주목받는 젊은 남자배우들의 출현.
●한국영화아카데미, 젊은 감독들의 놀이터
과연 ‘제2의 <파수꾼>’은 언제 나타나게 될까. 2016년 설립 10주년을 맞이한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지난 10여년간 거둬들인 성과를 살펴보면 한국 독립영화의 젊은피를 수혈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연구와 제작을 병행하는 영화 전문 교육과정으로서의 장편영화제작연구과정은 연출 데뷔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은 신인감독들에게는 든든한 발판이 되어주는 곳이다. 2007년부터 시작된 장편영화제작연구 과정은 이들 작품을 교육기관의 성과물로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시장에서 안정적인 배급의 저변 확대도 고민해 CJ ENM과 산학협력 업무 제휴를 맺고있다.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 조성희 감독의 <짐승의 끝>, 홍석재 감독의 <소셜포비아>, 안국진 감독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이 모두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감독들의 작품이다. 이들 감독은 독립영화 제작방식 등을 경험한 뒤 상업영화 현장으로도 진출해서 활동하고 있다.
●10년 동안의 얼굴, <벌새>의 배우 김새벽
순박했고, 연약했고, 강인했고, 비밀스러웠고, 또 날카로웠던 지난 10년 동안의 김새벽은 한국 독립영화에서 가장 믿음직한 얼굴 중 하나다. 김경묵 감독의 <줄탁동시>(2011)로 데뷔한 그는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2013)를 거쳐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눈부시게 명멸하는 불꽃처럼 높이 솟아올랐다. 스크린에 김새벽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것은 곧 사려깊고 세밀한 감정의 발현을 뜻했고, 친숙하지만 결코 간파할 수 없는 틈새를 남기는 배우였다. 이완민 감독의 <누에치던 방>(2016)에서 추억 속의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을 완성한 것도, <걷기왕>에서 불쑥 귀여운 얼굴을 하고 나타난 것도 모두 김새벽다웠다. 어쩌면 김새벽은 가장 독립영화다운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는 배우일지도 모른다. <초행>(2017), <얼굴들>(2017), <국경의 왕>(2017), <풀잎들>(2018) 그리고 <벌새>(2018)와 <항거>(2019)로 지난 시간 그어느 때보다 빠르게 필모그래피를 완숙하게 채워나가고 있는 김새벽. 그녀는 이제 독립영화의 스타를 넘어, <벌새>의 주인공 은희가 그러했던 것처럼 어린 시절 우리가 동경했던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출처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3749
[한국 독립영화④] 독립예술영화 시장 10년을 되돌아보며 ‘무엇으로부터 독립할 것인가’를 묻다
예상된 위기 끝에 마주한 새로운 시대, 그리고 가능성들
독립예술영화 시장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정확히는 존재는 하되 유령처럼 희미해져가는 중이다. 독립영화의 제작과 배급, 흥행의 어려움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의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2018년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개봉편수는 113편으로 총관객수는 110만명 수준이었다. 관객수 시장점유율로 따지면 한국영화 관객 전체의 0.51%에 불과하다. 2015년부터 1%선을 유지해오던 관객점유율이 절반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2014년 2.61%였던 점유율이 2015년에는 1.13%로 떨어졌고, 2017년에는 0.96%를 기록했다가 2018년 들어 전년 대비 절반 이상 급감했다. 해마다 관객수 및 매출이 반 토막이 난 셈인데 2018년 평균 관객수는 9774명이었다. 이 수치는 몇해 전과 비교하면 하락폭이 훨씬 피부에 와닿는데 가령 2014년의 평균 관객수 4만 92명에 비해 2018년 관객수는 20%에 못 미칠 정도다.
독립예술영화가 사라졌다?
반면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제작편수는 그렇게 줄어들지 않았다. 2014년 114편이었던 제작편수는 꾸준히 100편 이상을 유지했으며 107편이던 2017년에 비해 2018년에는 오히려 몇편 늘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수치들은 하나의 결과를 시사한다. 제작 환경 자체가 열악해진 것이 아니라 배급과 상영 환경이 급속도로 악화됐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 수는 있는 상황이지만 관객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독립예술영화 제작이 수월해진 것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시장 환경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꾸준히 작품이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영화 제작, 연출자들이 각자도생으로 여러 방식을 시도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전통적인 제작방식이나 열악해진 독립영화 진영 바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이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2009년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 2012년 오멸 감독의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2013년 우문기 감독의 <족구왕>, 그리고 2018년 김보라 감독의 <벌새>까지 지난 10년간 의미 있는 결과를 남긴 작품들 대부분이 각자의 분투로 이뤄낸 결과물이다.
꾸준한 시도와 각자도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독립영화 시장은 관객이라는 최종 고리를 잃고 무너져가는 중이다. 어떻게든 제작을 이어나가던 것도 지난해를 기점으로 한계에 부딪친 분위기다. 독립예술영화 관객수는 2013년부터 2억명을 넘어선 전체 영화 관객수와 정반대의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2014년 4%대를 유지하기는커녕 갈수록 시장 전체의 크기가 줄어들어 현재는 산업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2017년 10만 관객을 넘긴 한국 독립예술영화는 단 3편에 불과했고 2018년에는 <그날, 바다> 한편만 10만 관객을 넘었다. <그날, 바다>의 경우 정치적인 이슈와 결합하여 54만 관객을 동원했으니 이례적인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18년 한국 독립영화 흥행 3위가 관객 5만9천여명을 모은 <소공녀>였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소공녀>의 기록은 2017년 기준으로 흥행 9위에 해당하는 성적으로 1년 만에 전체 관객수가 눈에 띄게 급감한 것을 알 수 있다. 1만 관객을 달성하기 어려워진 이러한 분위기는 산업이 기능을 유지할 최소한의 관객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자아내고 있다. 충성도 높은 관객층이 사라진 당장의 수치도 암울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새로운 관객 개발과 다양성 확장을 위한 시도가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관객이 빠져나가는 만큼 새로운 관객이 유입될 필요가 있는데 제작 인력이 새롭게 유입되는 것과 달리 이 부분은 연구와 분석조차 이뤄지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현 시점에서 지난 10년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건 이 때문이다. 2008년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가능성을 알린 <똥파리> 이후 10년, 마찬가지로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며 평단의 인정을 이끌어내고 있는 <벌새>가 등장했다. 현상은 비슷해 보이지만 주변을 둘러싼 환경은 완전히 바뀐 상황에서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여전한지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양성영화라는 그림자와 독립영화의 위축
독립예술영화 시장 진단에 앞서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독립예술영화에 대한 개념 정의다. 어떻게 보면 모든 문제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인 개념에서 독립영화는 ‘자본과 상업영화 제작시스템으로부터 독립’을 통칭하지만 시장 분석을 위해선 좀더 엄격하고 협소한 정의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 수치와 통계에 잡히는 독립예술영화들은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38조 1항과 2항에 의거, 독립예술영화 인정 등에 관한 소위원회가 독립, 예술영화로 선정한 영화들을 말한다. 이는 지원과 관리를 위한 기준이며 이러한 영화들이 해를 거듭해 축적되면 이른바 ‘독립영화진영’이라는 귀납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요컨대 기존의 독립영화에 대한 접근은 독립영화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2007년,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2007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시네마워크 사업계획안’을 발표하며 ‘다양성영화’라는 용어를 들고 나온 것이다. 때로 언어는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 다양성영화라는 용어 안에 기존의 독립, 예술, 다큐멘터리, 저예산영화들을 모두 포괄하여 적용하자 환경이 급변하기 시작한다. 독립, 예술, 저예산영화는 각각의 고유한 태도와 방향성이 있다. 때로 이것이 일부 겹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제작하는 영화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저예산은 말 그래도 예산의 크기에 따른 구분이고, 예술영화는 (다소 자의적이지만) 작가의 예술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놓는 영화를 말한다. 독립영화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업영화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하여 감독의 창의성을 보장하는 영화들을 통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개념들을 하나의 울타리 안에 뒤섞어버리면서 독립영화들도 고유한 색을 잃기 시작한다.
다양성영화의 의도와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상업영화에 비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는 영화들을 지원하기 위한 장치였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독립예술영화의 시장을 축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9년 300만 관객을 동원한 <워낭소리>, 2014년 480만 관객의 사랑을 받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처럼 폭발적인 흥행작들에 관심이 모아지고 상대적으로 다른 영화들에 대한 지원과 육성은 도외시되었다. 흥행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작품을 지원하는 것이 독립예술영화의 기본 취지였던 것에 반해 다양성영화의 경우 다양성영화라는 또 다른 시장 안에서 내부 경쟁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독립예술영화의 자생적인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흥행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영화에만 지원을 모을 경우 반대로 다양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다양성 보호라는 목적과 경쟁력 고취라는 방법이 역전되어버린 셈이다. 그렇게 다양성영화 시장은 결국 단지 예산이 적을 뿐인 또 다른 상업영화 시장으로 변질되었고, 끝내 각자 다른 카테고리의 영화들을 경쟁시켜 서로의 다양성을 깎아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영진위가 정책 방향을 선회해 다시 독립예술영화의 배급과 유통 지원을 위한 준비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는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재차 강조하건대 때로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변화의 바람은 독립과 예술이라는 이름을 되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독립영화는 지난 10년간 승자 독식의 게임, 정치적 메시지의 억압 등 여러 방식으로 억제되어왔다. 한편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놓지 않고 버텨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018년 한국독립영화협회, 인디스토리 등 독립영화를 지켜온 곳들이 20주년을 맞이했다. 물론 위기의 징후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1996년 시작되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영화제인 인디포럼은 재정적인 문제와 운영상 문제를 이유로 2019년 한해를 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영화계는 꾸준히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 중이다. 아토ATO나 광화문시네마처럼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 독자적인 색깔을 내는 제작사들이 생겨났고, 산업적인 어려움과 별개로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 <벌새>의 김보라 감독처럼 꾸준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젊은 감독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특히 새로운 독립영화 세대의 출현 방식이 그야말로 각자도생, 그러니까 시스템이나 선배 세대의 유산에 기대지 않고 맨몸으로 시대와 부딪쳐 얻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실로 독립영화답다. 어쩌면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그 욕망이야 말로 독립예술영화의 원천인지도 모르겠다. 갈수록 척박해지는 환경 속에서도 제작편수가 줄어들지 않는 건 시대 변화와 무관한 창작에의 열망 그 본질적인 에너지를 대변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를 받쳐줄 제도적 장치다. 창작의 접근성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은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다.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은 제작에 대한 지원보다 공급망과 배급에 대한 안정적인 파이프라인의 설계다. 다행히 영진위 등 관련기관에서도 이 사실을 인지하고 ‘2019~22한국영화발전계획(안)’을 통해 독립예술영화의 중요 방안으로서 ‘독립예술영화 유통배급종합지원센터’의 신설 운영을 제시했다. 개별 영화에 대한 지원을 넘어 유기적인 유통·배급망을 통해 안정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앞으로 독립예술영화를 위한 현실적인 지원 방안일 것이다. 특히 극장 플랫폼의 관객수에만 철저히 의존했던 기존 수익모델에서 벗어나 관객과의 접점을 늘릴 수 있는 다양한 창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크리에이터에의 진입 장벽이 낮아진 만큼 영상 콘텐츠 소비자들의 접근 통로도 다변화되었다. 실제로 온라인 기반 VOD와 OTT(Over The Top) 시장의 확장은 독립예술영화에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시대에 따라 개념은 바뀌기 마련이고 영화에 대한 인식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 독립예술영화도 마찬가지다. 변화한 시대에 독립과 예술의 개념을 명확히 하여 ‘무엇으로부터 독립할 것인가’ 혹은 ‘독립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자문해볼 때다. 그 고민에 답을 내놓는 과정에서 ‘어떻게 독립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길이 열릴 것이다.
출처: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3750
[한국 독립영화⑤] 2010년대 한국 독립다큐멘터리의 우연한 역사
과거는 지나가지 않는다
[국제 영화제의 수상이나 상영 여부가 훌륭한 영화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세계가 한국에 원하는 것, 한국이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것이 어떻게 만나왔는가를 보여주기에 유용한 지표다. <벌새>(2018)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을 체감했던 우리에게 각별한 텍스트이지만, 그 시기를 겪지 않았거나 사건을 모르더라도 영화의 감상 자체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영화는 인물의 내면과 관계라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보편적인 언어로 특정 시공간을 그려낸다. <벌새>가 촉발한 역사와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작품들을 자유연상 방식으로 이어보며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가 기억해온 것에 관한 짧은 상을 그려보고자 한다. 랜덤 방식으로 채택된 이 우연한 목록은 오늘날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보여준 역사 쓰기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벌새>와 비슷한 시기를 다룬 정윤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2013)에서 출발해보자. 2014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 넷팩상 수상작인 이 영화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지존파 사건으로 얼룩진 20년 전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과거의 사건을 다룬 영화들이 무서운 건 우리를 망각의 늪에서 건져 올려서가 아니라, 아무리 끔찍한 사건이라도 시간의 거리감이 전제되는 한 그것은 일종의 매혹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를 <논픽션 다이어리>처럼 서늘하게 새겨둔 경우는 드물다. <논픽션 다이어리>에서 지존파 사건은 하나의 기호처럼 인식된다. 초반 자막을 통해 이 사건을 비정상적인 개인들의 반사회적 특수성에 가두는 대신, ‘자본주의를 범행동기로 삼은 최초의 범죄행위’로 재의미화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기득권층을 향한 반발심은 어쩌면 다수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것이기도 하다. 이를 받아들일 때, 이들의 실패는 자본주의와 빈부격차가 심화된 오늘을 수용하게 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맥락에서 <논픽션 다이어리>는 불가능성을 상징하는 추억이자 오늘날에도 영속되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인간의 감정 상태를 보여준다.
<논픽션 다이어리>와 나란히 넷팩상을 수상한 박경근 감독의 <철의 꿈>(2013)은 <논픽션 다이어리>와 거의 정반대의 자리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본다. 철강 산업, 특히 조선소 산업은 부국강병을 꿈꾸던 때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거리두기와 비판이 예상되는 지점에서, 영화는 사적 에세이와 순수한 꿈으로 선회한다. 어떤 것에 대한 국가적, 국민적 열망을 보낸 경험은 되돌아보면 부끄럽기 마련이지만, 그것 역시 우리의 얼굴이 아니었느냐고 영화는 묻는 것 같다. MBC와 공동 제작이기에 가능했을 내밀한 촬영은 과거 철강 산업에 매혹되었듯, 지금이 이미지들에 매혹되어보라고 권유한다. 누군가는 철을 신처럼 섬겼고, 이러한 기억을 담은 영화는 이미지를 신처럼 섬긴다. 그것의 거대함에 압도된다면, 당신은 영화에 홀린 것이다.
우리는 철강에 얽힌 꿈에 압도되기 이전에 그 속에 사람이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 수상작 <위로공단>(2014)은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여성 노동사를 잇는 대규모의 프로젝트다. YH, 동일방직, 구로공단, 삼성반도체, 기륭전자, 한진중공업 등 한국 노동사를 줄기로 삼아 감정노동, 캄보디아 유혈사태와 이주노동자들의 요구 등으로 확대하며 한국만의 것으로 한정할 수 없는 전 지구적 여성 노동사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공업 시대를 향한 매혹이 끼어들 틈이 없다. 구로공단 50주년을 맞아 복원된 수출의 여인 제막식 장면을 역으로 감아 동상을 다시 막 안으로 감추어버리는 장면은 고정된 역사 이미지를 해체하는 영화의 태도를 요약한다. 인터뷰와 이를 보조하는 퍼포먼스, 이미지가 교차하는데 이는 단지 다큐멘터리의 예술성을 과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퍼포먼스에 가까운 비인간화를 요구하는 여성 노동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에 의미가 있다. 해외에서는 ‘시적’ 영화라 평하며 형식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야마가타국제영화제 특별상을 받은 김동령, 박경태 감독의 <거미의 땅>(2012)은 한국 내부의 낯선 곳으로 침잠해 들도록 유도한다. 기지촌은 주로 한국 근현대사의 상흔을 품은 호기심과 치욕의 공간으로 재현되어왔다. <거미의 땅>은 철거를 앞둔 경기도의 한 기지촌을 본다는 것을 거의 신비할 정도로 낯선 경험으로 만든다. 이곳에서 만난 세 여성은 오늘을 보여주는 대상이 아니라 세명의 길잡이이자 퍼포머처럼 보인다. 자칫 과도하거나 넘칠 수 있는 부분은 관찰적 시선과 공간의 귀기를 포착하는 사운드로 인해 장소성과 유리되지 않는다. 곧 사라질 공간과 그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교차해내며 다큐멘터리 만들기의 한 방식을 보여준다. 해외에서는 자극적인 이야기에 기대지 않은 영화의 균형감을 높이 샀다.
동시대의 삶을 포착한 다큐멘터리이자, 그 자체로 느슨한 역사 쓰기 방식을 환기하는 몇편의 작품을 덧붙이고 싶다.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작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2015)는 우리가 보이는 것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는지를 절감하게 만든다. 박강아름은 주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외모에 관해 품평하도록 유도한다. 머리 좀 단정히 해라, 안경을 벗는 게 낫다, 옷 좀 사라, 살을 빼라, 화장해라 등등의 조언이 쏟아지는데, 이 말이 보수적인 상사에게서가 아니라 주인공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의견이기도 하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외모 꾸미기의 압박을 가장 심하게 받는 상황 중 하나인 소개팅 중계, 다양한 방식의 외모 꾸미기 실험 등을 통해 외모에 관한 압박을 스스로 돌파한다. 1인칭 다큐멘터리가 사적인 것으로 분류되곤 하지만, 영화는 가장 사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나의 외모 가꾸기가 전혀 사적일 수 없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여준다. 이것이 이 작품이 지닌 중요한 성과 중 하나다.
타이완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아시아비전 경쟁대상을 수상한 <개의 역사>(2017)는 오늘날의 역사 쓰기 방식 그 자체를 보여준다. 우연히 만난 개의 역사를 탐문해가다가, 집을 찾아 떠도는 나의 유랑기와 그 과정에서 만난 인물의 인생 유랑기가 스며든다. 중간에 이야기가 확장되긴 하나 어떤 이야기도 다른 것을 위해 희생되지 않고 서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맞물리는 것이 영화의 힘이다. 대만여성영화제 상영작인 <야근 대신 뜨개질>(2015)은 직장 여성으로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여주지만, 결코 거기에 머무르지만은 않는다. 뜨개질은 내 손을 움직여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사소한 것이자, 어떤 결과물이 되었을 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행위로 그려진다. 연대가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영화의 중요한 지점이다.
다큐멘터리는 고정된 과거에 관한 추체험이 아니라, 체험이 과거를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기억을 창조한다. 우리가 몰랐던 과거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생생한 현재임을 알게한다. 그러므로 과거는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도래한다.
출처: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3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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